편집 : 2022.9.26 월 11:28
> 뉴스 > 기획특집 > 박영규의 부동산 탐구
       
용산 대통령 관저의 무학 대사는 과연 누구였을까?
2022년 06월 30일 (목) 09:13:51 박영규 부사장 renews@renews.co.kr
   
(박영규 부사장)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키는 설을 말한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존경하던 무학 대사에게 ‘새로운 왕궁터를 알아보라’ 지시를 내리니 계룡산 등 전국으로 새 도읍지를 찾아 다니던 무학 대사가 어느 날 돌고 돌다 왕십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에 소를 몰던 노인이 지나 가면서 큰소리로 ‘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을 닮았구나.”

잠시 왕십리 풍세에 빠져있던 무학 대사가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노인에게 자신이 바로 그 조롱하던 무학임을 솔직히 밝히며 그곳에 오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니, 노인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를 더 가면 좋은 터가 있소.”

무언가에 홀리듯이 산신령 같은 노인의 말을 듣고 서둘러 십 리를 더 간 끝에야 무학 대사는 마침내 ‘지금의 경복궁 터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온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도 ‘십 리를 더 가라’는 뜻으로 이 일로 왕십리의 지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대의 토지 활용 측면에서 보면 한양 도성 백성들에게 로컬 채소 및 단백질을 공급 하던 곳이 왕십리 일대와 마장동등으로 아직도 지명으로 남아 있다.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조선의 주궁 역할을 하던 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 한다는 의미이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 대원군의 명으로 중건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일제의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경복궁 복원 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거의 마무리 된 상태다.

청와대는 노태우 정부 때 시설 신축 및 증축을 크게 하여 문재인 정부 때까지 사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복궁의 구중궁궐에 청와대가 자리 잡아 있기에 조선왕들의 혼령들이 아직도 경복궁을 맴 돌면서 ‘이곳의 주인은 우리 이 씨들이니 너희 다른 성씨들은 이곳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 당장 꺼지거라’라고 청와대에 들어오는 대통령들에게 꿈자리가 뒤숭숭하게 나타나 판단력에 훼방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필자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청와대만 들어가면 국민과 단절돼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분기탱천하며 수시로 언제든 국민과의 소통을 부르짖던 당선인들이 청와대만 입성하면 국민과는 어느새 저 멀리 단절되어 독단적이고 가끔 형편없는 판단들을 내리는걸 보면 대통령 터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풍수 자리가 음기가 강해서인지 불행한 사고가 많이 일어났던 것 같기도 해서 풍수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도 알다가도 모를 의구심도 문뜩 든다.

사실 일제가 훼손한 경복궁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보면 청와대 시설들도 다른 곳으로 이전 내지 폐쇄가 옳을 수도 있으나 청와대 역시 이제는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매김 하게되어 앞으로 사용처 및 존재 여부가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그 태반의 이유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 즉 개경은 이미 지기(地氣)가 다해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구세력(舊勢力)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신(新)왕조의 면목을 일신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 하였다고 봐야 된다.

그밖에도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계룡산이 수도가 된다는 등 실로 풍수지리설이 국가와 민간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필자가 어릴 적에도 정감록의 계시대로 정씨 성을 가진 이가 곧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설을 믿는 정씨 성을 가진 친구들이 꽤나 근거 없는 자부심을 내뿜던 일이 기억난다.

그래서인지 故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정감록의 주인공이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들도 하곤했다. 오늘날에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니(右白虎) 운운하는 것이며 ‘조상의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조선 때부터는 엉뚱한 묘 자리 욕심에 천착하다 남의 조상 묘에 자기 조상 도둑묘를 몰래 옮겨놓아 몇 백 년간 싸움을 하던 유명한 두 집안 송사도 아직까지 전해진다.

그런 것을 보면 마냥 무시 할 수만은 없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급기야는 강의 한 번에 몇 백 만원 씩 받는 유명 강사들이 활동 중이고, 그로인해 학문으로까지 추앙 받으며 풍수학과 대학원 모집과정이 인기리에 마감 되는 게 현실이다.

여담으로 DJ도 대선에 실패하다가 유명 풍수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용인으로 조상 묘를 옮긴 후 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설이 당선 후에 돌아다녀 풍수에 한 자락 하는 ‘내노라’ 하는 전국의 풍수가들의 묘 자리 답사 필수 코스로 알려지기도 하였던 뉴스도 생각이 난다.

아무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 가장 먼저 한 일중의 하나가 용산으로 대통령 관저부터 옮긴 것이다. 윤대통령의 무학 대사는 누구 시길 래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회한이 가득한 용산으로의 이전을 신속하게 결단 내린 것인 지 사뭇 궁금하다.

용산은 백제 시대 때부터 기록에 나와

용산의 지명이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백제 기루왕 21년(A.D 97)으로 그해 4월에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산세에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은 형체라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용은 우리에겐 가장 커다란 길상의 상징으로 성공한 인물의 길을 인도하는 영물로 받들어 졌다. 서울 지방에도 양화도 동쪽으로 잠두봉이 일명 용산이라 불렸었고, 망원동의 산세도 용산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서울 지방의 용산으로 대명사가 된 곳은 한강의 용산강인 용산으로 이는 오늘날의 용산구가 있게 된 자연지세가 큰 역할을 한 것이라 전해진다.

필자의 모친도 어릴 적 해방 후 서울에서 성장 하실 때 해주신 말씀으로는 지금의 용산 시내쯤에 개천이 흘렀었는데, 외할아버지 친구 분이 딸처럼 모친을 예뻐하시어 용산 개천에서 멱을 감아 주실 정도로 물이 맑고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형이 하도 많이 변해버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시겠다’고 한다. 조선말기까지는 지방에서 올라오던 곡물 등의 창고나 전국에서 올라온 특산품들의 물류창고 역할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육군의 대륙 침략의 한반도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었고, 6.25이후엔 다들 알다시피 미군의 가장 핵심 동아시아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곳이 바로 용산이었다.

지금이야 미국의 변한 동아시아 방위 정책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젠 그 소임을 다해 평택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용산은 새로운 변신을 시도 하려고 하던 차에 새 정부의 대통령 관저가 들어서게 된 것이 마냥 시대적으로 단순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듯싶다.

인터넷상에서 활동하는 풍수가의 지론에 의하면 북한산, 북악산을 타고 온 기맥이 인왕산을 거쳐 남산에 이르고 또 이 기맥이 흘러와 둔지산에 이르는데 둔지산 바로 밑이 국방부 신청사로 대통령 실이 이전한곳이 바로 그 지점이라 주장한다.

즉, 남산을 주산으로 하여 둔지산을 ‘현무’로, 남산에서 하얏트 호텔을 걸쳐 이태원, 서빙고동으로 내려오는 능선을 ‘좌청룡’으로, 인왕산에서 만리동 고개 효창공원으로 내려오는 능선을 ‘우백호’로 삼고 한강 건너 동작동 서달산(국립묘지)을 안산"으로 볼때 큰 틀에서 보면 ‘명당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심운).

작금 40년만의 인플레이션과 그로인한 기준 금리 인상의 여파로 암울한 세계 경제 상황에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유류 곡물등의 물가 상승의 와중에도 마냥 올라 갈 것 같던 서울의 집값들이 주춤하고 있는 요즘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도 강북 부동산 최고 강자를 차지하며 용산구의 집값은 오늘도 힘차게 계속 상승 중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새로운 왕궁 터에 대한 국민들의 동경과 미래 우리들의 희망 프리미엄이 섞여 들어간 자리 값도 포함돼 있으리라 추정해 본다.

국민들이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는 왕궁 터가 되어야

뉴욕 센트럴 파크를 능가하는 대형 공원이 들어서리라는 기대와 더불어 국민들에겐 추억과 힐링의 터가 될 용산에서 새 정부의 용산 시대에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그리 크지 않다.

합리적인 주택 가격과 젊은 층을 위시로 국민들에게 주거의 안정을 도모하고 살인적인 물가를 잡아 팍팍한 살림살이부터 진정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

좋은 왕궁 터를 찾기 위해 공을 들인 이성계도 한국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조선의 원류인 경복궁에 총독부를 지은 일제도 대한민국의 그동안의 12분의 대통령님들도 자기들의 역할들을 다한 후엔 거의 자연으로 돌아갔다.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기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본다. 그 끝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다면 아무리 풍수 터가 좋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윤 정부도 임기동안 용을 품은 용산에서 다시 한 번 힘찬 용틀임을 하여 대한민국의 또 한 번의 도약을 바라며, 새로운 터의 좋은 기운을 받아 국민들에게 웃는 날을 많이 가져다주시길 풍수를 관장하는 지신에게 간절히 기원해 본다.

그런데, 용산 대통령 관저를 점지해준 이 시대 무학 대사는 과연 누구였을까?

 

 

ⓒ 부동산신문(http://www.re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  |  기사제보  |  광고안내  |  제휴안내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36-2 맨하탄빌딩 1207 | 대표전화(구독문의) 02-786-7001 | 팩스 02-786-7008
등록번호 : 서울다07611 | 창간 년월일 : 1998년 4월 28일 | 발행인 : 장상인 | 편집인 : 안진우 | 부사장 : 박영규 | 편집국장 : 이준철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장상인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상인 | Copyright 2007 부동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