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던 원로가수 백년설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라디오방송은 ‘대지의 항구’, ‘산 팔자 물 팔자’ 등 그가 남기고 간 노래들을 내보냈다. ……. 몇 해 전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가 미국에서 이승을 떴을 때도 라디오방송은 그 애절한 가락들을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지난 2000년 10월, 담백하면서도 준열한 문장으로 우리 사회를 꿰뚫던 이광훈 전 경향신문 논설주간이 신문에 쓴 칼럼의 한 부분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백년설, 김정구 외에도 한때 우리 문단의 중심부에서 활약했던 박남수, 안수길, 김동리, 박두진, 황순원 등이 “거짓말처럼 홀연히 떠나감으로써 한 시대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며 애석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침 시인 서정주가 소꿉놀이 하듯 오순도순 지내던 부인을 먼저 보낸 뒤 여든 중반의 노구를 이끌고 미국으로 떠나려던 무렵이었습니다. 아내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하려던 것이었겠지요. 그는 이에 대해서도 “속마음을 나누던 김동리도 가고 황순원도 가고, 60여년을 해로하던 아내마저 떠난 서울이 그에겐 또 하나의 폐도나 다름없을 것”이라며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관훈클럽 총무와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위암 장지연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삼성언론재단 이사 등을 지낸 언론인이었지만 그는 문학 분야에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63년, 이미 스물두 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월간 세대지 초대 편집장을 지냈고, 이듬해에는 문학춘추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평론가였습니다. 이처럼 문인들의 타계에 대해 관심을 표시한 것도 그런 때문이었겠지요.
그 자신이 타계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바로 엊그제는 추모 유고집이 발간되어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습니다. “미당이 미국으로 떠나면 그동안 많은 문인들의 정신적 메카였던 흥인동 시대도, 공덕동 시대도 아득한 전설로 남게 될 것”이라고 비탄하던 그가 유고집을 남긴 채 역시 전설의 공간으로 떠나간 것입니다. 앞서의 칼럼도 유고집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
생전에 늘 해학과 위트를 보여주던 그였지만, 이번 유고집 편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고집은 문학평론과 칼럼, 그리고 추모글 등 세 권으로 묶였는데, 그 가운데 칼럼 선정의 기초작업을 내가 맡았던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경향신문 논설주간 재직시 그 밑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자신이 쓴 글을 컴퓨터에 꼼꼼하게 저장해 놓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워드프로세서 장치가 도입되기 이전인 20~30년 전의 글에 대해서도 신문 지면을 사진으로 찍어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저장된 칼럼만 해도 모두 1,200여 편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기껏 100여 편밖에 칼럼집에 실을 수가 없었기에 아쉽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신문에 게재된 칼럼에 대해서도 추가로 가필을 해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컴퓨터 저장 글과는 별도로 칼럼을 프린트하여 문장을 일부 고치거나, 토씨를 바꾸는 등의 세심한 작업을 해 놓았습니다. 아마 본인 나름대로 앞으로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그랬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이처럼 평소에도 자기 준비가 철저했던 것입니다. ‘논객 이광훈’은 그냥 만들어졌던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물론, 문학평론 원고는 별도입니다. 이화여대 김치수 석좌교수와 고려대 김화영 명예교수께서 정리해 주신 문학평론의 원래 원고뭉치는 칼럼 쪽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렇게 추리고 추린 문학평론과 칼럼 원고를 이종석 장지연기념회장,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문창극 중앙일보 대기자, 이창순 관훈클럽 사무국장 등이 참여하는 전체 편찬위원회에서 최종 확정했던 것입니다. 유족 대표로는 고인과 시돈지간인 이규용 씨가 편찬위원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렇게 편찬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광훈 논설주간이 아직도 더 일할 수 있는데도 너무 일찍 떠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붙잡는데도 뿌리치고 떠나가신 분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붙잡을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고 애틋한 것이 또한 사람의 운명이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
어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으나 언론계의 선배들이 계속 떠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2~3년만 해도 권오기 조세형 리영희 양호민 김성한 김태홍 등이 떠나갔고, 그보다 한두 해 전에는 남중구 이규행 장기봉 오소백 정달영 김광섭 이정석 이상권 설국환 박무 서기원 등이 떠나갔습니다. 특히 올 들어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이상철 씨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 함으로써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언론계에서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떠나가도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문장, 그리고 시대를 향한 깨우침의 정신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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