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평화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비정하게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흐르면 전쟁을 도발한 자나 전쟁을 지휘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전쟁에 희생당한 아픔의 상처는 역사의 강을 영원히 흘러간다."

 월남전 참전 용사이자 소설가인 김창동은 소설 <순간에서 영원으로>에서 '전쟁으로 인한 아픔의 상처는 역사의 강을 영원히 흘러간다'고 했다.
하지만, 한 때 사이공(Saigon)이었던 호찌민은 전쟁의 상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아픔이 아닌 활기로 가득했다. 1975년 4월 30일. 당시 월맹군에 의해 함락된 사이공- 1976년 남북 베트남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이름표를 호찌민으로 바꾸어 달았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를 향한 힘찬 전진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참전 용사 최순조의 소설 <사이공 1670>은 사이공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쩔쩔매던 한국 교민들의 철수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분이 제출하신 철수계획서에 나타난 재월한국인 수는 농업사절단 22명, 의료사절단 23명, 수자원 사절단 6명, 민간인 1,011명입니다. 여기에다 우리 외교관 23명과 외교관 가족 61명을 포함하면 모두 1,146명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두 안전하게 철수시키려면......."
 35년 전 월남에 살고 있던 한국인이 1천여 명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될까? 호찌민 시(市)에만 한국 교민이 7만 명이나 살고 있으며 이동 인구까지 감안하면 1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교민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 날 우리가 베트남과 총 뿌리를 서로 겨누는 악연(惡緣)을 쌓기도 했으나, 오늘날은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여 서로 손잡고 경제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증거다. 실제로 필자가 호찌민 시내를 돌아보자 삼성, LG 등의 전자 제품 광고는 물론이고 현대건설, GS건설, 포스코 건설, 롯데 건설 등 굴지의 건설 회사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은 구(舊) 시가지의 모습을 털어내고 현대식 건물로 도시의 옷을 바꾸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인구 850만의 호찌민은 이와 같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먼저 거리를 꽉 메운 오토바이의 행렬에서 도시의 심장이 발산하는 뜨거운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교통 신호가 바뀔 때마다 맹수처럼 돌진하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청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소음을 일으키지만, 그것이 바로 도시가 살아있고 젊다는 것을 암시하는 신호인 것이다.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이들에게 희망과 열정이 넘쳐난다.

"이 곳 사람들은 모든 생활이 오토바이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토바이에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자며, 남녀 간의 데이트도 오토바이에서 하니까요. 젊은 베트남은 오토바이처럼 빠르게 달리는 기회와 도전의 땅입니다." 호찌민에서 건설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조장희 사장의 말이다. 베트남에 이토록 희망이 가득한 것은 이 나라가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경제발전이라는 대명제(大命題)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내려온 베트남인이 개척한 습지 촌락이었던 사이공은 프랑스인들이 의해 배수 시설이 정비되어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1908년 시로 승격된 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프랑스풍의 건물들이 많아 '아시아의 파리'로 불리어지기도 했던 호찌민-
호찌민은 분명 도전해 볼만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자원이 풍부하고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핵가족화로 인한 주택문제는 시급한 해결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호찌민은 이러한 주택 건설에 관련하여 한국 건설회사들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와 베트남 사람들이 과거의 악연(惡緣)을 털어버리고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 스스로 베트남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다질 필요가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근로자들이나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여인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의형제'에 도망간 베트남 여인을 잡으러 다니는 부끄러운 설정이 깔려 있다. 베트남 사람이 보면 가슴 아플 일이다. 작은 일 하나하나가 성숙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