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 1일. 파키스탄 도로공사(NHA)는 대우건설을 최종 협상 대상자로 결정하고 12월 4일 낙찰의향서(L/I: Letter of Intent)를 보내왔다. 그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노라 하는 세계의 유수 기업들을 물리치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주했으니 말이다. 낙찰 의향서는 계약상의 제 조건이 일단의 합의점에 도달했을 때 공사를 발주할 취지의 의사를 표시하는 통지서다. 발주처는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계약을 진행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뿐,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금문제였다. 가격·공사기간 등의 본 계약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이 대체적으로 해결되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세금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해외건설공사에서는 세금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해외 공사에서 현지국의 조세제도를 잘못 파악하여 땀 흘려서 번 돈을 송두리째 세금으로 내고 적자를 보는 경우도 많다.
아무튼, 1991년 12월 30일 오전 10시. 미 합의된 세금문제를 의제로 하여 본 계약을 위한 실무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소는 파키스탄 국영 도로공사(NHA) 사무실이었다. 발주처 측에서는 파키스탄의 재경부 차관, 도로공사 사장(Moshin H Shei-kch), 도로공사 계약담당임원, 재정담당임원, 기술담당인원이 참석했고 대우측에서는 해외 사업본부의 박계오 상무, 이주홍 이사, 김장수 부장이 참석했다.

발주처의 주장은 완고했다. 파키스탄의 표준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소득액의 55%를 법인세로 납부하도록 하는 규정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대우의 협상팀은 소득의 반 이상을 세금으로 낸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반박하면서, ‘소득에 관계없이 매출액의 3%를 세금으로 내겠다’고 했다. 공사에서 이익이 나든지 적자가 나든지 관계없이 매출액의 3%를 원천징수하자는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쉽게 끝날 것으로 기대했던 협상은 예상 외로 길어졌다. 파키스탄 측은 “세율을 바꾸려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세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고 버티었다. 밀고 당기는 가운데 시계 바늘은 하염없이 원을 그리기만 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협상이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1991년 12월 30일 밤. 파키스탄에 파견되었던 해외사업본부의 이주홍 이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 세율을 3%로 하겠답니다. 그런데 내년 6월에 개최되는 정기 국회에서 세법을 개정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12월 30일 자정까지 본 계약을 체결하지 못할 경우 계약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이사는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필자가 서울 본사에서 전화를 받은 시각은 12월 31일 새벽 3시였다. 한 해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던 계획이 빗나가버린 순간이었다. 필자는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필자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협상을 중단하고 귀국하라.”

단일 도로공사로는 세계 최대인 10억 달러의 프로젝트를 날려버리는 뜻밖의 선언에 본사의 협상지원팀은 모두 까무러칠 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최고 경영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본사의 해외사업본부는 현지의 협상 팀과 전화통화를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해외사업본부의 이현구 전무는 파키스탄의 도로공사(NHA) 사무실로 팩스(Fax)로 보냈다.
“이 공문을 대우의 협상 팀에게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협상을 중단하고 귀국하라는 최고경영자(CEO)의 지시입니다.” 물론 영어로 보낸 문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