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1일 입찰 정보를 입수해 11월 14일 마감하는 고속도로 공사의 견적서 제출은 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노력 여하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가 솟는 법이다.
해외사업본부 임직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입찰서 제출에 매달렸다. 회사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집념과 끈기로 물량과 가격산출에 몰두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전광석화처럼 지나간 2주일 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쌓아 온 해외건설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감 시한인 11월 14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입찰서를 제출했다. 공사금액 10억1900만달러, 설계비 900만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까지는 몇 차례의 줄다리기가 있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총 10억달러로 결정이 났다. 10억달러는 우리 돈으로 1조원에 해당된다.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제2의 산업도시인 라호르를 잇는 왕복 6차선 357킬로미터의 고속도로 공사였다.<사진 굵은 선 구간> 공사 금액만으로도 건설사에 기록될만한 쾌거였다. 그리고 설계와 시공을 일괄적으로 수행하는 턴키방식의 공사를 세계의 유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 고속도로 공사는 ‘나와즈 샤리프’ 전 수상이 펀잡(Punjap) 주 수석 장관 재직 시부터 입안되어 오다가 수상재임 초기인 1991년 후반에 시행된 거대 사업이었다. 샤리프 전 수상은 파키스탄의 취약한 인프라 시설을 확충해 경제개발을 촉진한다는 야심적인 사업이었다. 하천교 3개소 및 입체 교차로 10개소를 비롯해 교량만 112개소, 토공사 380만㎥, 콘크리트 44만㎥, 아스콘 260만톤 등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능가하는 방대한 물량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가격협상 이후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다. 파키스탄 정부가 총 공사비 중에서 1000만달러나 깎자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순간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었다. 건설 현장의 중장비를 무기로 들이댄 것이다. 우리나라 공사 현장의 장비는 감가상각 기간이 5년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장부상에 부외자산으로 남는다. 장비로서의 수명이 끝난다. 이처럼 수명이 다 된 장비를 보관하거나 관리하기 위해서도 막대한 경비가 들어간다. 파키스탄은 개발도상국이라서 장비의 감가상각기간이 8년이나 된다는 것을 착안했다. 공사현장에서 사용했던 장비를 파키스탄 정부에 무상으로 양도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공사비를 깎자는 파키스탄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현장의 노후 장비를 처리하는 묘책을 제시한 것이다. 파키스탄 정부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3년의 잔존가치가 있는 귀중한 장비를 돈 한 푼 안들이고 얻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을까? 협상이라는 것은 서로를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어느 한 쪽만 이익을 봐서는 안 된다.
 
미국의 ‘맥스 베이저만’ 교수는 “협상은 대결이 아닌 경쟁과 협력이 필요하다”면서 “어떤 점에서는 일종의 창조적 문제해결 방식이다”라고 했다. 귀중한 장비를 얻은 파키스탄 정부가 만족하고, 부외자산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창조적인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필자 회사는 공사 준공 후 모든 장비를 깨끗하게 정비해 약속대로 파키스탄 정부에 인도했다. 그 후 파키스탄 정부는 그 장비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경제개발에 기여했다고 했다. 필자로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파키스탄 고속도로의 공사 수주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일 고속도로 공사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는 것과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서남아시아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일 회사가 초대형 고속도로 공사를 수행한 세계 최초의 공사이기도 했고, 자금 조달이 포함된 공개경쟁 입찰에서 최초로 수주한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파키스탄 자국민 뿐 만 아니라 제 3국의 엔지니어 활용을 극대화한 점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