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국무총리 비서, 약관 26세의 최연소 국회의원, 40대로서 대통령 후보 지명전 도전, 신민당·통일민주당·민주자유당 총재, 6∼10대 국회의원, 제14대 대통령, 서울 충현교회 장로.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걸어온 주요 발자취이다.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해가 바뀌어 우리 나이로 78세가 된다. 하지만 동안(童顔)의 얼굴에다 말과 움직임이 10∼20년 밑쯤으로 보인다. 시원한 이마, 가끔씩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더욱 젊은 느낌을 준다. 지난 7일 밤 경기도 분당 성남상공회의소 대강당에서 열린 21세기분당포럼 주최 초청강연 및 신년인사회 때 참석한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란 화두로 11년 전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5년을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32년 간의 군사문화 청산, 문민민주주의 완결이 큰 과제였지요.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개방은 물론 대통령 안가와 지방공관을 없앴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안가에 대해선 설명을 길게 덧붙였다. “안가는 청와대 안에 12채가 있었어요. 궁정동과 삼청동에 걸쳐 있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안됐죠. 대통령이 가수, 탤런트, 배우들을 데리고 놀고 가끔 기업총수들도 불러들였던 비밀공간입니다. 정원이 넓고 모양도 일반집과 달라 전혀 딴 곳 같습니다. 저녁마다 마시고 놀다 박정희 대통령은 끝내 그곳에서 총에 맞아 죽지 않았습니까.”

  안가 철거와 함께 정치군인 하나회 숙청에 대해서도 비화를 들려줬다. “그 때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했을 것이고 김대중 씨나 노무현 씨 모두 대통령을 못했을 겁니다. 1군사령관, 11만 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수도경비사령관을 잘랐어요. 대통령이 되기 오래 전부터 결심했던 일로 극비에 붙여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2군사령관은 별 힘이 없는 사람으로 그냥 뒀지요. 그런데 웃기는 일이 벌어졌어요. 미국 뉴욕타임스가 YS가 군과 동거한다는 기사를 쓴 것입니다. 하나회를 해체하는 마당에 동거라니…. 보도경위를 알아봤더니 대장급인 1군사령관의 목을 자르고 육군 중장을 발탁, 4성 장군으로 진급시켰더니 이를 동거한다고 본 거죠.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된 것인데 참! 기가 차서…” 

  김 전 대통령은 12·12군사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규명과 관련, 그 무렵 도입된 금융실명제 때문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갔다고 들려줬다. 

  “조선일보 등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광주사람들을 살인한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내가 유엔에 가 있는데 청와대에서 ‘큰 일 났다’며 전화가 왔어요. 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들어있는 은행계좌번호까지 들추며 조사를 요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귀국해서 보니까 연희동은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벌어졌고 경찰청장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사안이 심각하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박관용 비서실장(현 국회의장)을 불러 청와대기자실에 가서 ‘이 문제는 역사에 맡긴다’고 말하도록 하고 두 대통령을 구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대통령 퇴임 전에 두 사람을 석방시켜놓고 상도동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금융실명제가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금융실명제야말로 개혁 중의 개혁이라 생각한다며 도입 때의 에피소드들을 떠올렸다.

  “홍재형·강경식 두 장관을 불러 금융실명제 도입을 지시하고 만약 비밀이 새나가면 모두 옷벗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작업을 주도한 재무부 국장이 직원들을 데리고 미국출장 간다고 속이고 일본까지만 갔다가 살짝 돌아와 아파트를 얻어 극비리에 작업, 보안이 유지됐습니다. 그들의 가족들도 전혀 몰랐으니까요. 금융실명제는 그야말로 성공작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때 차떼기로 돈이 오간 것은 금융실명제를 피하기 위한 수법이다”면서 돈의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하다가 생겨난 일로 봤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재임 중 추진했던 사법개혁, 교육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 중 금융·노동부문은 김대중 씨를 중심으로 한 야당과 일부 세력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경제위기로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더욱이 위기가 오래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기아사태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대선후보들이 기아자동차 공장을 경쟁적으로 방문, 근로자들을 무책임하게 부추기며 기아를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처리하지 못하게 만들어 결국엔 금융위기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금융개혁과 노동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 게 뭣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개혁엔 정도를 걷겠다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짓과 위선, 불투명한 계산과 불공정성을 가지고선 절대 성공할 수 없어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정의롭게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도자의 무능과 헛된 욕심이 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온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숲 속에 들어와 길을 잃었을 땐 처음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가 원점에서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작은 미련과 오기가 나라 전체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과거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점수를 준다면 얼마나 주고, 당장 시급하게 고쳐야 할 점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점수요, 많이 못 줍니다. 20점 정도 될까요. 고칠 점은 대통령으로서 말이 너무 많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말할 기회가 많긴 한데 입을 열 때마다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 점에 대해선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픽업해서 정계 들어왔고 대통령까지 됐어요.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재야인으로 있었을 텐데….”(웃음)

  김 전 대통령은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했다. 아시아·태평양시대가 열리고 있고 자원은 부족하지만 지적능력을 가진 한민족에게 일찍이 없었던 기회가 오고 있는 까닭이란다.

  자신이 대통령시절 정보통신부를 신설, 전국의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하고 범국가적 정보화시책을 적극 추진했던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였다고 설명했다. 해양수산부 신설도 대륙과 해양으로 무한히 뻗어나가야 할 한민족의 기상을 펴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는 것.

  “한반도 주변 4강 국가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4강의 이해를 조정하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대립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나가야 합니다. 한민족동포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집중 분포돼 있어요. 남북민족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 위에 화해를 이룩하고 한민족네트워크를 형성, 신한국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는 4월 15일 국회의원 총선를 앞두고 영향력을 행사할 뜻은 없는지, 또 선거결과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느냐는 물음엔 직답을 피했다. 대신 현재 4개 정당 중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이어 한나라당의 내분에 대해 말머리를 틀었다.

  “오늘(7일) 서청원 한나라당 전 대표가 왔길래 과거 경험을 통해 볼 때 야당이 싸우면 인기는 올라가지만 심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싸우는 것은 좋으나 절대 판이 깨지면 안 된다는 소립니다. 이 얘기는 최병렬 대표에게도 했습니다.”

  한나라당에 대해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엔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하는 것 아니냐”면서  많은 국내·외 사람들이 상도동으로 와서 당 얘기를 전해준다고 했다. 심지어는 매년 봄 가을 일본 와세다대 특명교수자격으로 현지특강을 하다보면 일본 국회의원들까지도 한국정치를 걱정하며 정보를 들려준다고 귀띔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때 자신의 아들(현철 씨)구속에 따른 뒷얘기와 당시의 소회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현철이 문제가 나오면 괴로워요. 그 때 아들을 잡아넣으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도 시끄러워 어느 날 당시 김기수 검찰총장을 청와대로 불러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지시하자 마땅한 죄목이 없어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 정치자금법 관련 이자를 안 냈다는 사유로 구속시켰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분당 나들이엔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한나라당 고흥길·임태희 국회의원,  이대엽 성남시장, 김주인 성남상공회의소 회장, 이영해 전국포럼연합 상임대표(한양대 교수)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