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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아이언 코드(Iron Code)
2021년 03월 07일 (일) 10:40:44 편집팀 정리 renews@renews.co.kr
   
(안병호 작가: 동학사 가는 길, 천년의 불꽃, 오타 줄리아, 아름다운 사람 루이델랑드, 어링볼, 철의 왕국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가지산파(迦智山派)는 선종 구산(九山)의 한 산문이다. 신라국 무주 가지산 계곡에 자리 잡은 보림사가 중심사찰이다. ‘철조비로자나불상’이 신라 47대 헌안왕 3년(서기859년)에 만들어졌다. 삼층석탑과 석등 등이 남아있다.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그곳에 철조불상이 있게 된 것도 ‘일연(一然)이 가지산파에 속했다’는 것과 연관지어 진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 중 한반도에도 서기(瑞氣)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사찰을 세울 곳을 찾았다.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서 호소했다.

“스님! 제가 있는 못에 용(龍)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선녀의 말을 들은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도망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 그래서,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용리 등이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宗刹)로서 고려 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용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철광이다. 위의 이야기가 상식적인 범주에서 이해되려면 용 대신에 철광맥을 대입시켜야 한다. 다시 말하면, 원표대덕은 인도의 보림사와 중국의 보림사에서 산문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워왔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가지산문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관점은 여러 곳에서 설정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도의(道義)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파의 제1세 개산조다. 도의가 평생 수도정진 했던 사찰이 진전사다. 이 진전사에서 도의의 제자로 남종선을 이어받아 가지산파의 제2세로 불리는 염거(廉居), 지눌(知訥) 등이 수도했던 사찰이다. 도의는 서기821년(현덕왕13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선법을 펴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길로 설악에 들어가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은거했다.

가지산문을 언급한 것은 일연이 아홉 살의 나이로 입산한 사찰이 가지산문의 지소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옮긴 절들이 모두 가지산문의 지소였음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점이 분명한 지표를 말해 주고 있다.

고려 고종14년(서기1227년). 일연은 양양 진전사에서 승과인 선불장 상상과에 장원급제한 후, 포산(현풍 琵瑟山) 보당암으로 옮긴다. 그는 포산에서 22년을 머문다. 젊은 일연의 황금기가 포산, 즉 비슬산(琵瑟山)에서의 시절이다. 여러 조건이 열악한 진전사와 달리 고향과 가까운 비슬산 보당암은 주변 여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용이 맥을 이루고 있지 않고, 표토만 걷어내면 쉬이 캐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뭉쳐 있었지만 긴 갱도를 파고드는 것 보다는 나았다. 용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보당암 근처 뿐 아니라 인근 무주암, 묘문암도 같았다.

‘비슬(琵瑟)’이란 인도 범어의 발음을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신라시대 인도스님들이 이 산을 구경한 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과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옥포면, 유가면에 걸쳐 있는 대구분지 남부산지의 주체다.

북쪽 팔공산과 더불어 대구의 명산으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유가사, 용연사, 소재사, 용천사 등의 사찰과 약수터와 참꽃 군락지가 있다. 일연 스님이 개명한 인흥사도 비슬산에 있던 사찰이다. 용천사도 일연스님이 불일사로 개명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비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포산 일대는 고려무신 정권의 실질적인 무기생산의 원료인 무쇠용출을 도맡아 수행했다. 무신정권의 집사가 이곳을 근거로 무기와 재물을 조달하기 위해서 들락거렸다.

여러 역사서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정치적 이야기는 서술하면서도 무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결과적인 것만 보면 ‘무쇠의 기록을 사기에 남긴다’는 것이 금기시 되었을 듯싶다. ‘비슬산’이라는 이름 자체를 ‘무쇠산’이라는 뜻으로 풀어보면 가지산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름 아닌 ‘아이언 코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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