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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예술의 선구자, 김우진을 만나다
2019년 08월 14일 (수) 10:10:30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김우진이라는 극작가 아시죠?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아!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그 사람이죠?”
“맞습니다. 그 분의 생가터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거든요.”
 
목포공생원(원장: 정애라)에서 업무를 마치자 김영찬(69) 씨가 필자에게 한 말이다. 그와는 취재 과정에서 만났으나 짧은 시간에 많이 가까워졌다.
 
김영찬 씨는 골목길 언덕으로 차를 몰았다. 길이 좁아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차와 부딪칠 정도였으나 능숙하게 운전했다. 드디어 김우진의 동상과 만났다.

   
김우진 선생의 동상

‘수산(水山) 김우진(金祐鎭, 1897-1926)- 1920년대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유일한 극작가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근대극의 선구자’라는 그의 약력과 함께 대표작 산돼지(희곡) 친필원고가 새겨져 있었다. 
 
1926년에 발표된 ‘산돼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이다. 작품은 원봉의 내면적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고, 일제 강점기 시절 젊은 지식인이 겪는 좌절감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작품 ‘산돼지’는 일상의 테두리 안에 갇혀서 어떤 실천도 꾀하지 못하는 ‘집돼지’가 된 식민지 지식인의 좌절을 담은 작품이다.
 
동상의 오른쪽 벽에는 <김우진 전집 Ⅰ·Ⅱ·Ⅲ>, <이영녀>, <난파>, <산돼지>, <생명력과 고갈> 등 그의 작품들이 빼곡히 있었고, 고개를 들자 ‘반딧불 작은도서관’이라는 간판도 보였다.
 
김우진의 생가 성취원
 
언덕 길을 오르자 북교동 성당이 나왔다. 이 성당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김우진 씨의 생가가 여기였습니다. 그의 부친이 이 땅을 천주교 교구에 기부했어요.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김영찬 씨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다. 그 시대에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이유 불문 훌륭한 사람이다. 성당 내부의 뜰에는 ‘김우진 문학의 산당’이라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표지석에 새겨진 글이다.

   
'김우진 문학의 산당' 표지석

<이 곳은 신문학 초기에 극문학과 연극을 개척 소개한 수산 김우진 선생이 청소년기에 유달산 기슭을 무대삼은 희곡 ‘이영녀’ 등을 썼던 자리임.>
 
성당을 나서자 펜스 벽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김우진 부친이 당시 정부에 올린 글

“인민을 보호하는데 어려움이 실로 슬프고 민망할뿐더러 외국인의 비웃음과 모욕이 사람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며, 점점 더하여 국가의 체면을 훼손한다.”
 
이글은 김우진의 부친 김성규(1863-1936)가 1903년 4월 22일 목포의 상황에 대해서 정부에 올린 글의 일부다. 김성규는 조선말기에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목포 조선인들의 인권보호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후일 기업인으로 변모해 거부가 됐다.
 
성당의 펜스 벽면에는 세 아들에 대한 사진과 약력이 소개돼 있었고, 김우진의 시 <청춘>이 있었다.
 

   
김우진의 청춘(詩)

아 청춘은 머물지  않아라.
흐르는 물같이도
서늘하게
지는 꽃같이도
애닯게
사람의 청춘은 간다.
아 청춘은
이 홀몸의 생의 물결에
한줌의 흙덩이!
힘 있게 생의 물결 판에
던져라, 용소리치게.

 


책을 통한 전문가들의 증언...사의 찬미
 
<목포 유달산 동쪽에 위치한 성취원은 99간의 대궐 같은 기와집으로 주변 빈민층의 움막들과 대비되어 더욱 위용을 자랑하였다. 영세 어민들이 주종을 이루는 빈민지역에서 김성규의 장남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빈부차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하게 되었고...>
 
<18세(1910년)에 일본의 구마모토(熊本)현립농업학교에 입학한다. 부친의 뜻에 의해 농업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김우진이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문학이었다.>
 
<‘나는 시인이 될 것을 바란다. 불만족, 증오하는 현실을 도피하여 나의 갈 바는 환각의 세계뿐이다’라고 토로하며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시인이 되고자 했다.>
 
이은경 박사의 저서 <수산 김우진 연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김우진은 현실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사유(思惟)의 세계를 동경했던 것이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윤심덕이 가사를 쓴 <사의 찬미>의 1절이다.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도나우 강의 잔물결’-피아노 반주는 동생 윤성덕이 했다.

 ‘그 후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26년 8월 3일 윤심덕은 연인 김우진과 함께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고 귀국하던 중 김수산(金水山)·윤수선(尹水仙)이라는 가명으로 유서를 남기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자신의 운명적 삶을 담은 ‘사의 찬미’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윤심덕, 김우진 (출처: 월간조선)

그 당시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두 남녀의 정사 사건은 여러 가지 의혹을 남긴 채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당시 사회는 너무나 닫혀 있고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 항의조차 이해 못했다. 그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뒤에도 그들의 죽음을 즐긴(?) 당시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그것은 확신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부단히 저항을 계속했다. 그들의 원혼이 현해탄의 수평선 위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선혈을 뿌렸던 것이다. 그들이 자살한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의운(疑雲)이 걷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유민영 교수가 저서 <비운의 선구자 윤심덕과 김우진>에서 밝힌 내용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손승휘의 소설 <사의 찬미>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일본 고베에서 이태리로 잠적하는 것으로 엮었다.
 
<멀리 고베의 항만이 모습을 드러냈다...승선이 시작되었다. 심덕과 우진도 사람들 틈에 끼어서 더디게 배로 연결된 다리를 건넜다...둘은 그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숨결을 느끼며, 서로의 몸이 닿는 느낌을 즐기면서 배에 올랐다. 배는 이태리를 향해서 출발했다.>
 
현해탄에는 이토록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은데 그 아픔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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