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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굴절, 비애(悲哀)의 나가사키(長崎)
2018년 07월 19일 (목) 10:32:22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 표지석(石碑)에 담긴 항구(港口)의 역사
 
우리에게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나가사키(長崎)는 아직도 노면 전차가 달리고 있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20엔(한화 1,200원)이나, 일일 회수권을 500엔(5,000원)에 사면 하루 종일 마음대로 타고 내릴 수 있다. 대부분의 역이 주요 관광지와 인접해 있어서 이용에 불편이 없다.
 
필자는 얼마 전 나가사키 역 앞에서 전차를 탔다. 데지마(出島) 전역(前驛)인 오하토(大波止)에서 내려서 니시하마(西浜)를 향해 언덕길을 올랐다. 날씨가 더워서 걸음을 멈추고 땀을 닦던 중 나가사키 현청(縣廳) 제3별관 건물 벽면에 서 있는 작은 표지석(石碑) 하나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생소한 글이 쓰여 있었다.
 
‘남만선(南蠻船) 내항(來航)의 부두(波止場)가 있었던 곳’

   
'남만선 내항의 부두' 표지석

표지석의 글은 ‘남만선(南蠻船) 내항(來航)의 부두(波止場)가 있었던 곳’이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정취어린 바닷가였으나 매립공사에 의해서 지형이 달라진 것이다.
표지석 옆 안내판의 짧은 글속에 나가사키 항구의 희망과 굴절,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571년 포르투갈 선박과 포르투갈 인(人)이 빌린 중국 선박이 처음으로 나가사키 항에 들어왔다. 이 후에도 포르투갈 선박은 매년 내항하여 나가사키는 국제적 도시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당시 이곳은 기다란 곶(串)의 앞부분이었다.
 
1582년 ‘이토(伊東)만쇼’, ‘지지와(干干石)미게루’, ‘나카우라(中浦)줄리안’, ‘하라(原)마르치노’라는 4명의 덴쇼(天正, 1573-1591) 소년사절단이 로마를 향해 출발한 곳이었다.
 
1614년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나이토 조안(內藤如安) 등 가톨릭 신자들이 마닐라와 마카오로 추방된 곳도 이 부두였다.>
 
일본에서 일컫는 남만선(南蠻船)의 개념은 중국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에서 오는 선박을 ‘남만선’이라고 했으나, 중국은 남방에서 오는 모든 선박을 총칭해서 ‘남만선’이라고 했다. 표지석의 글을 따라 역사 속으로 돌아가 본다.
 
나가사키를 개항한 오무라 스미다테(大村純忠)
 
1563년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1510-1570)’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오무라 스미다테(大村純忠, 1533-1587)는 일본 최초의 크리스천 다이묘(大名)이다. 토레스(Torres)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1552)와 함께 일본에 입국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이다.

   
남만선의 모형(아마쿠사 콜레지오 박물관)

오무라 스미다테는 1570년 나가사키의 개항을 승인했다. 그 결과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배가 정기적으로 내항하게 됐다. 나가사키가 세계를 향한 뱃길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평탄대로의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572년 다른 성주(後藤·松浦·西鄕)들의 공격이 계속됐고, 나가사키 최초의 교회가 화염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무라(大村)는 신념을 잃지 않고 예수회의 부강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의 영지에는 6만 명이 넘는 신자가 있었다. 이는, 일본 전체 신자의 절반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였다.
 
지병으로 인해 몸이 쇄약해진 그는 1587년 6월 23일 ‘신부 추방령’이 내려진 전날 생을 마감했다. 죽기 하루 전 ‘새 장에 키우던 새 한 마리를 하늘로 날아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새를 함부로 다루는 시녀를 꾸짖었다’는 말도 감동적이다.
 
“새는 제우스님이 만든 것이므로 항상 가엾게 생각해라. 앞으로는 애정을 가지고 대하도록 하라.”
 
모두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957)의 <일본사>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의 종교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로마로 떠난 덴쇼(天正) 소년사절단
 
오무라 스미다테(大村純忠)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소년들을 유럽에 보내는 일을 착수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자신을 비롯해서 지역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토모 소린(大友宗麟)과 협의해서 4명의 소년을 선발했다. 이 중에서 3명은 오무라(大村)의 연고자였다. 4명의 소년들은 1582년 나가사키 항에서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희망의 나라 로마로 떠났다.
 
소년들은 로마에서 교황 접견 등 환대를 받으며 8년의 세월을 체재한 후 1590년에 귀국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그리스도교가 융성(隆盛)한 것을 직접 목격한 그들은 신부가 되려고 했다. 1591년 7월 25일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콜레지오(Collegio) 부속 수련원에 입교했다. 이들의 유럽 파견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알레산드로 발리나뇨(1539-1606)’ 신부는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콜레지오의 감사를 거쳐 두 번째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마쿠사 콜레지오 박물관 입구에 그려져 있는 덴쇼소년사절단의 모습

안내판의 그림은 그들이 파견 당시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기사다. 원본은 교토(京都)대 부속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당초대로 펼쳐지지 못했다. 막부의 크리스천 탄압 정책에 의해서다. 아마쿠사 콜레지오 박물관(관장: 本多康二)에 근무하는 우와쿠치 히로코(上口浩子·56)씨의 말이다.
 
“이토(伊東)씨는 1612년 병사(病死)했고, 지지와(干干石)씨는 1633년 사망했습니다. 하라(原)씨는 1629년 마카오에서 병사했고, 나카우라(中浦)씨는 1633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꿈꿨던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각기 다른 길을 걷다가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먼 옛날의 일이지만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 슬픈 일이다. 안내판 상단에 쓰여 있는 ‘유구(悠久)의 시대를 넘어’라는 문구가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필리핀으로 추방당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552-1615)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숨어 지내던 가가(加賀)현에는 1,500명의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마닐라에 있는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

다카야마 우콘은 1614년 막부의 선교사 추방령에 의해 여러 나라의 국적을 가진 기독교인 350명이 필리핀의 마닐라로 추방됐다. 그들이 단체로 추방된 곳이 바로 표지석이 서있는 나가사키 항구였던 것이다.
 
그해 12월 중순에 마닐라에 도착한 다카야마 우콘은 열병으로 도착 40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350명 중에 조선인 수사(修士) ‘가이오(Caius)’가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다.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세례명 ‘가이오’로만 알려져 있다. ‘가이오’는 필리핀에서의 꿈이 좌절되자 1616년 일본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옥살이를 하는 신자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붙잡혀서 나가사키에서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1624년의 일이다.
 
필자가 지난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을 찾은 적이 있었다.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보호대를 감고 있는 그의 동상을 보면서 역사의 무상함을 느꼈다.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은 1977년 11월 17일 일본과 필리핀의 합의에 의해 세워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반대도 있었으나 세우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또한 ‘유구(悠久)의 시대를 넘어서’ 벌어진 애절한 사연이다.
 
지금은 아스라이 잊힌 400여 년 전의 일들이지만, 그들의 궤적은 기록에 의해서 소곤소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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