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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京都)에서 우연히 만난 윤동주의 잔영(殘影)
2018년 05월 24일 (목) 11:22:59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 정류장은 도시샤(同志社) 대학 앞입니다."
 
교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던 필자는 안내 멘트에 귀가 번쩍 뜨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도시샤(同志社) 대학은 시인 윤동주(1917-1945)가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차 확인하자 운전사는 ‘내려서 뒤쪽으로 조금 돌아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답변했다.

   
서정문에서 바라본 도시샤 대학

도시샤 대학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에서부터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대학은 한 청년의 뜻(志)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쇄국의 일본을 개방하려는 의지로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자’가 됐다. 청년의 이름은 니지마 조(新島 襄, 1843-1890). 그가 1875년 도시샤 대학(同志社英學校)을 설립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학교가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때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캠퍼스는 고즈넉했다. 갑자기 이방인(異邦人)이 된 필자는 두리번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경비원 신세를 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윤동주 시비(詩碑)가 어디 쯤 있나요?”
 
“똑바로 가시다가 우측으로 돌아가세요. 저기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 앞에 있습니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 나란히 있어
 
경비원의 말대로 건물사이로 들어가자 나무아래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의 시비가 나란히 있었다. 비(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쓰여 있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서울 휘문고보를 거쳐 1923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29년 영문학과를 졸업하기까지의 6년 동안 이 캠퍼스를 무대로 영문학 공부와 함께 주옥같은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0년대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문단의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을 간행하여 현대시의 확립에 기여하였으며, 유능한 시인을 문단에 등용시키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현, 이화여자대학)의 교수와 경향신문의 주간을 역임하였고, <지용시선>을 비롯한 산문집을 간행하였다.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옥천군, 옥천문화원, 정지용 기념사업회는 그를 기리기 위하여 이곳 모교에 시비를 세웠다. 조각된 시는 교토를 노래한 대표작 <압천>이다.>

   
정지용 시비

사실을 토대로 한 글이었다. 바로 옆에 서있는 윤동주 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동주에 대한 글도 일본어와 우리말로 쓰여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

   
윤동주 시비의 글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 이자 독실한 크리스천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 중인 1934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渡日)하여 도시샤(同志社) 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혐의를 입어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그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었다. 한글로 된 서시는 그의 자필 원고 그대로이며, 일본어 번역은 이부키 고(伊吹鄕)씨의 것이다.>
 
다소 어눌한 한글 표현이지만,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필자는 혼자서 시비에 새겨진 빛바랜 서시(序詩)를 읽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비

 필자는 읽고 또 읽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시(詩)였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필자는 ‘주변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정의 벤치에 앉았다. 오래 전에 필자가 <월간조선>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와 윤동주
 
“인간의 얼굴은 하나의 줄기위에 핀 일 순간의 꽃이다./ 바람과 새가 날라다 준 종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피고 지는 존재/ 인간도 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느니….”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가 쓴 <하나의 줄기 위에>라는 수필에 담긴 내용이다. 그 책에도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청춘의 시인’ 윤동주―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심벌, 순결의 심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린 윤동주의 작은 액자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1990년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씨를 도쿄에서 만났다고 한다. 시인은 윤인석 씨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함께 ‘아우의 인상화(印象畵)’란 시를 소개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살그머니 작은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슬픈, 진정코 슬픈 대답이다...”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윤인석 씨가 큰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며 “자신도 이에 공감한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京都)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한일 간의 간극(間隙)은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뚜벅뚜벅 도시샤 대학 교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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