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고즈넉하게 내리던 어린이날 순천역에서 내렸다. 생소한 지역이라서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말벗이 되고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택시 운전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목적지는 노량해전(露粱海戰). 하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운전사가 ‘하동이나 남해로 가야 가깝다’고 하면서 멈칫멈칫할 즈음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목적지 변경입니다.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갑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노량까지의 요금이 많이 나옵니다.”

걱정스럽게 필자를 바라보던 운전사의 얼굴이 오히려 활짝 펴졌다. 택시는 속도를 내더니 순식간에 순천만 국가정원 정문에 내려놓았다. 목적지 변경이 내심 아쉬웠으나 때마침 봄꽃축제(4월 7일–5월 7일)가 열리고 있어서 ‘꿩 대신 닭’이었다.

봄꽃 속 세계정원도 볼만해

순천만 국가정원(동문) 입구

비가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형형색색의 우산을 든 관광객들과 하얀색 비닐 우의를 입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순천만 국가정원의 역사를 더듬어봤다. 2013년 4월 20일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과 동시에 영구개장을 발표했고, 2015년 1월 20일 수목원 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공포됐으며, 그 해 9월 5일 선포식을 가짐으로써 명실 공히 국가정원(1호)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

정원 입구의 꽃과 이파리들-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는 듯 넓었다. 111.2ha(34만 평)이니 그러할 것이다. 통로 입구에서부터 봄꽃들이 관광객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꽃과 잔디 옷을 입은 두루미 형상의 조형물은 관람객들의 포토존이었다.

두루미 형상의 조형물

실내 정원에는 아담과 이브의 열매-‘코코 드 메르(Coco de mer)’, 바오밥나무(Baobab tree)‘등 희귀한 식물들이 많았고 사막의 정원도 독특했다.

<꽃과 나무의 품격, 화목 구등품제>에 대한 안내문은 ‘유박(柳璞, 1730-1787)’의 저서 <화암수록>에 실린 9등급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유박은 20년 동안 정원을 가꾸던 선비다. 그는 매화 · 국화 · 연꽃 · 대나무 · 소나무를 일등급으로 분류했고, 해바라기 · 동자꽃 · 한련화 · 창포 · 회양목을 구(九)등급으로 분류했다.

국가정원의 전체를 다 돌아볼 수는 없는 일. 필자는 비를 피하면서 안내 지도를 펼치고 돌아볼 곳을 살폈다. 먼저 세계 정원을 돌아보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태국 정원

세계 정원 중에서 첫 번째 만난 곳이 태국정원이었다. 태국을 상징하는 특유의 건축물과 거대한 코끼리 상(像)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두 번째로 일본정원이 있었다. 필자가 자주 가는 나라이기에 관심이 많아서 보다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 정원은 규슈(九州)의 사가현(佐賀縣)의 정원 형식이었다. 2011년 전라남도와 사가현(佐賀縣)이 우호교류 약정을 체결한 이유에서 만들어 졌다.
사가현의 북부 현해탄이 전라남도의 바다와 이어져 있으며 아리아케해(有明海)의 갯벌이 순천만과 닮은 점도 두 지자체가 교류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정원, 터키 정원, 이탈리아 정원, 스페인 정원, 미국정원이 자국의 특징을 내세우면서 관광객들을 유혹했다. 여러 나라의 정원 중에서 인기 만점은 네덜란드 정원과 풍차. 풍차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연인들과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풍차 아래에는 디기탈리스(Digitalis), 리나리아(Linaria), 팬지 등의 아름다운 화초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네덜란드 정원과 풍차

필자는 독일정원과 중국 정원을 거쳐서 프랑스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커피숍이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데도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이 정원은 루이 14세가 유럽문화의 중심으로 성장하고자 했던 꿈과 소망을 담은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도 했다’는 설명문을 읽은 후에 정원을 거닐었다. 위고(Hugo), 모네(Monet), 마네(Manet) 등의 유명 작가에 대한 사진과 설명도 좋았다.

프랑스 정원에서 꽃송이를 닦는 여인들

프랑스 화단에서 꽃송이를 닦는 여인들의 모습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비를 맞으면서도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관광객들의 눈이 행복해진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일일 140여 명이 투입되어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호수정원에도 많은 발길 이어져

호수정원 전경

호수에는 여러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이곳은 세계적인 경관 건축가 ‘찰스 쟁스(Charles Jenckes)’가 순천지역의 도심과 자연을 형상화한 것이란다. 안내판에 쓰인 글을 요약해서 옮겨본다.

<호수의 물은 순천의 기존 도심과 신도심의 소통을 의미하고, 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천과 순천만 습지는 푸른 다리로 표현하였습니다. 순천 호수를 감싸고 있는 언덕은 난봉산, 봉화산, 해룡산, 앵무산으로 가까운 주변 전망을 끌어 들여 실제 산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봉화언덕

필자는 앵무 언덕을 올랐다가 다시 봉화언덕으로 갔다. 한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에는 긴 행렬이 장관이었다. 어린이날이어서 아이들이 많았으나 유모차를 밀고 언덕길을 오르는 부정(父情)도 눈길을 끌었다.

언덕에 오르자 ‘봉화언덕은 포용과 어머니의 품이다’는 설명문에 이해가 갔다. 포근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봉화산(烽火山)은 순천시민의 어머니 품 속 같은 곳입니다. 봉화 언덕에 올라서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이 평화롭고 안락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동요와 꽃 차 퍼레이드로 분위기 조성해

“기차길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꽃 장식 자동차의 화려한 모습

어린이날을 맞아 스피커에서는 끊임없이 동요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동요에 맞춰서 춤을 추면서 즐거워했다. ‘우천으로 퍼레이드가 취소됐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사람들은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꽃 장식 차들을 보면서 환호했다.

순간, 이미 사라진 옛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무리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중년층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옛 교복을 빌려 입고 이벤트를 연출한 나이든 여고생(?)과 남학생(?)들이었다. 사람들의 질문이 그들에게 쇄도 했다.

고교생으로 돌아간 중년 여인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전주에서 왔습니다.”
“동창 모임입니까?
“그렇습니다. 동창 모임인데, 단체로 ‘추억의 교복’을 빌려 입고 왔습니다.”

당연히 인기 만점. 그들에게 시선이 집중됨과 동시에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순천은 세계 5대 연안 습지이자 생태계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을 잘 보존해야 한다.

국가 정원에 쓰여 있는 “내일이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며,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는 <위대한 개츠비>의 한 대목을 떠 올리면서 정원을 나왔다.

비는 그치지 않고 여전히 같은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내일은 맑은 아침이 올 것이다. ‘봄꽃들의 축제’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