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한글날. 한 때 밀려난 적이 있었지만, 다시 공휴일로 복귀한 까닭에 나들이를 했다. 징검다리 연휴라서인지 고속도로는 차의 흐름을 더디게 했다. 그래도 평소보다 크게 늦지 않게 여주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주를 찾은 목적은 '한글의 고장'으로 일컫는 지역에서 열리는 '훈민정음 반포 568돌 기념 한글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행사는 세종대왕릉에서 개최됐다. 행사장 진입로는 인산인해. 사람들과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글날을 기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

필자는 한글날과 세종대왕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릉(英陵) 입구의 길에 늘어선 은행나무들의 노란 이파리들이 가을을 알렸고, 논의 벼들도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종대왕 덕택에 도시 생활의 각박함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온 사실 자체가 좋았다.

영릉에 들어서는 길목마다 왁자지껄. 행사는 세종대왕 패널 전시, 훈민정흠 문자 보내기, 측우기 만들기, 백일장과 미술 대회....다른 지역과 달리 '한글의 고장'답게 풍성했다. 세종대왕(?)과 학생 두 명이 무대에서 펼치는 코믹 연기에 박장대소하는 구경꾼들의 함성을 뒤로 하고 영릉으로 들어서자 광화문과는 달리 꼿꼿이 선채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었다. 필자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담고 행사장으로 갔다.

파주, 여주, 울산, 일본 삿포로에서 보내온 LED패널의 한글문자

'한글로 잇다.'

이 행사는 여주시(시장 원경희)가 주최하고 여주대학교(총장 정태경)와 여주문화원(원장 김문영)이 주관한 '잇다(Connection)'였다. 가로 세로 4m 크기의 LED패널에는 초·중·종성의 한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조합되면서 글자를 만들어 냈다. 이번 행사가 갖는 특별한 의미가 또 있다. 파주와 여주, 울산, 일본 삿포로 등 4개 지역이 참여한 것이다. 각 지역에서 제작한 한글 자소(字素)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하면, 영릉에 설치된 LED패널에 무작위로 튀어 나온다.

이번 행사의 기획과 운영을 총괄한 여주대학교 정태경 총장은 '잇다(Connection)'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글자를 만든 사람과 그 글자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 어우러지는 세계 유일무이 (唯一無二)의 행사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글의 보편성과 세계성이 한글날과 영릉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서로 공명하고 널리 퍼짐으로서, 위대한 세종 정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로는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면서도 창조적 기획, 한글 진흥을 위한 정책이나 지원은 초보 수준이다. 기업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사 제품을 알리는 광고비는 천문학적으로 쏟아 부으면서도 이토록 의미 있는 행사에 대한 지원에는 고개를 돌린다.

이와 더불어 TED 형식을 차용한 한글 강연회도 특별했다. 정태경 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회는 한재준 서울여대 박물관장과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김경묵 삼성전자 디자인센터 수석이 연사로 나서서 '한글의 미래. 한글 디자인'에 대해 큰 방향을 제시했다.

<한글의 천년은 가능할 것인가?

 우리말은 천년 후에도 살아남을 것인가?

 딱 부러지는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답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출판인 김흥식 선생이 마음먹고 설파한 책 <한글 전쟁>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하면서 영릉의 소나무 아래에서 펼쳐진 행사장을 나왔다. 산 위에 자리한 세종대왕릉이 더욱 우러러보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