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전 제주도 신혼여행 시절 화산 석 사이에 핀 청초한 하얀 꽃을 보고서 힌트를 얻어 기른 화초가 하나 있다. 가느다란 잎(3mm)이라서 흔히 '실란'으로 불린다. 필자는 이 실란 한 뿌리를 구멍이 크게 뚫린 제주도 화산 석에 흙을 채워 넣고 심었다. 돌 사이에서 피어나는 실란의 청초한 하얀 꽃을 기대하면서다.

이 실란의 본명은 '흰꽃나도사프란'이다. 수선화과의 여러 살이 풀로 원산지가 남아메리카의 ‘리오델라플라타(Rio de la Plata)’ 지역인 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칠레 등이다. 영어권 국가인 서양에서는 'White Rain Lily'로 명명한다.

고급 요리나 화장품 등에 사용되는 관계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향신료 사프란(Saffron)이 있다. 사프란은 그램(g) 당 가격이 금(金)과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값이 비싸다. 이 사프란은 한 뿌리에서 2-3송이의 꽃이 피는데, 꽃 속의 암술 한 개를 따서 말린 것이다. 보통 1그램(g)의 사프란은 200-500개의 암술을 따서 말린 것이라고 한다. 1그램(g)의 사프란이 160여개의 뿌리에서 채취하는 양(量)이라고 하니 비쌀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아무튼, 실란은 사프란을 닮았다고 해서 '흰꽃나도사프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필자가  실란을 심은 지 1년 후에 장남이 태어났다. 그 실란이 필자의 장남과 동행해서 나이를 먹고 있는 셈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실란이 시들해 질 때는 혼비백산 물을 주기도 하고, 혹한(酷寒)에 동상이 걸려 이파리가 축 쳐지면 안절부절 안방에 들여 놓기도 했다.

특히, 장남이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정성을 다해서 물주기와 돌보기에 열중했다. 8월 하순에서 9월 초에 꽃을 피우는 화초라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8월 초부터 꽃대 올라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

'이 란(蘭)이 꽃을 잘 피워야 아이가 무사할 것이다.'

그런 장남이 지난 해 12월 결혼을 했다. 주례는 일본 친구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67) 씨가 맡았다. '한일 관계가 경색(梗塞)된 상황에서 오히려 민간인들이 우정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일부 매스컴에서 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와타나베 씨를 주례로 모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90세의 노모를 모시고 있고 장남 부부와 함께 살고 있으며, 손자·손녀가 9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다.

이날 와타나베(渡邊) 씨의 주례사도 특별했다. 그는 신부에게 "무(大根)부인이 되라!"는 키워드(key word)를 남겼다.

"무는 조림·찌개 등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죠? 무는 거기에 들어 있는 생선이나 고기류의 맛을 잘 흡수하고, 주위의 맛을 자기 속에 축적하는 힘이 있습니다. 신부는 이러한 무처럼 신랑 가족의 가풍(家風)을 빨리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신랑도 마찬가지입니다."

36세의 '흰꽃나도사프란'

장남이 결혼 후에 맞이한 첫 여름에 베란다의 실란이 하얀 꽃을 듬뿍 피웠다. 며칠 전 단 두 송이가 살포시 얼굴을 드러내더니 삽시간에 만발한 것이다. 예년에는 10여 송이로 여름을 마감했는데 올 해는 33송이가 피었고, 대기 물량(?)이 무려 10여 송이다. 이 정도면 소위 '꽃 대박'이다.

'지난 4월 차남까지 결혼을 했으니 손자 대박이 터질 것인가?'

36세의 실란, 흰꽃나도사프란의 향기가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친근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