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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神)이 된 조선인(1)
2012년 12월 11일 (화) 09:55:52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후쿠오카(福岡)'에서 윤동주(尹東柱)의 자취를 찾은 후 필자 일행은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사가시(佐賀市)를 향했다. 일반 도로(道路)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 도시 외곽도로가 생겨난 이후 30분 정도로 단축됐다. 운전은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씨가 맡았다. 그는 72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피드를 냈다. 낙천적인 성격이기에 운전에도 즐거움이 넘쳤다. 그는 달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박정식의 <천년바위>가 담긴 CD를 틀었다.

"동녘 저 편에 먼동이 트면/ 철새처럼 떠나리라/ 세상 어딘가/ 마음 줄 곳을/ 짚시 되어 찾으리라/ 생(生)은 무엇 인가요/ 삶은 무엇 인가요/ 부질없는 욕심(慾心)으로/ 살아야만 하나요."

노랫말이 창문 틈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처럼, 새록새록 가슴 속을 적신다. '우리네 짧은 인생-' 욕심(慾心)을 버리면 더욱 즐거워지리라.

'나베시마 나오가게(鍋島直茂)의 고향, '사가(佐賀)'

'사가(佐賀)'-하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베시마(鍋島)'는 일본 전국시대에서부터 에도(江戶)시대에 걸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무장이다. 그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1608년 사가성(佐賀城)을 구축해 히젠국(肥前國) 나베시마번((鍋島藩)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도공 이참평(李參平) 등을 일본으로 데려가 '아리타 야키(有田燒)' 라는 명품 도자기를 일궈내기도 했다. '아리타 야키(有田燒)'는 일본 도자기의 역사를 새로 썼다. 17세기 중반부터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됐다.
   
도진마치에서의 '오츠보'씨

필자가 이러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고향 사가(佐賀)를 찾는 데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 조선인으로써 일본의 신(神)이 된 이종환(李宗歡)의 행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다. '거기엔 필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가시(佐賀市)에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동석한 와타나베(渡邊)'씨가 필자에게 물었다. "네- 도진마치(唐人町, 一丁目)로 갑시다. 거기에서 '교우엔지(鏡圓寺)'를 찾읍시다."

교우엔지(鏡圓寺)를 찾아서-

도진마치(唐人町)는 쉽게 찾았다. 한자 그대로라면 당나라 마을이나, 그 당시는 외국인 마을을 총칭해서 불리던 곳이다. 그런데, '교우엔지(鏡圓寺)'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에 의지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어느 식당에 가서 물었다. 식당 할머니는 바쁜 점심시간인데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사가(佐賀) 사람들이 대체로 친절합니다."

'오츠보 (大坪)'씨가 이 곳 사람들의 성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인구 24만의 도시라서 그런지 거리가 그리 번잡하지 않고 조용했다. 길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필자 역시 여러 차례 이곳을 지나갔으나, 도심의 골목까지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차로 몇 바퀴 돌다가 아예 차를 주차장에 집어넣고, 걸어서 찾는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건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절(寺)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우리가 찾던 '교우엔지(鏡圓寺)'였다.

   
교우엔지(鏡圓寺)의 입구


절의 경내는 해묵은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으나, 본당(本堂)은 낡아 보이지 않았다. 이유인즉, 1913년과 1978년의 화재로 인해 소실됐고 지금의 본당은 1992년(平成 4년)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교우엔지(鏡圓寺)'의 유래가 적혀진 안내판을 읽어 내려가자 다음과 같은 글이 말미에 쓰여 있었다.

도진마치(唐人町) 최초의 고려인

<....묘지(墓地)에는 도진마치(唐人町)에 최초로 거주했던 고려인 宗歡(御用荒物商人) 일족 동 九山道淸(鍋島更紗創始者)의 묘가 있다.>

   
교우엔지의 유래와 고려인

'오츠보 (大坪)'씨와 '와타나베(渡邊)'씨가 무릎을 쳤다.

"도진마치(唐人町)에 최초로 거주했던 고려인이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장(張) 상이 이곳에 오자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어용황물상인(御用荒物商人)'이란 전근대 일본에 있어서 봉건 영주의 비호아래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상인을 말한다. 즉, 공공기관에 물자를 납품하는 상인으로서 각종 특권을 누리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동족인 '구산(九山)의 묘'가 같이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구야마 도우세이(九山道淸)'라는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나베시마 사라사(鍋島更紗)' 창시자(創始者)라는 말에 빠져들었다. 사라사(更紗)는 인도를 기원으로 하는 목면지(木綿地)의 문양염(文樣染) 제품을 말한다. '나베시마 사라사(鍋島更紗)'는 일본 최초의 문양염으로 '나베시마(鍋島)'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염직 기술자 '구야마 도우세이(九山道淸)'라는 사람을 일본에 데려온 후,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 부분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사가신문(佐賀新聞)에도 '나베시마 사라사(鍋島更紗)'에 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베시마 사라사(鍋島更紗)'의 기법은 16세기 말 조선반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나베시마(鍋島)' 번주 사용 외에는 외부로 반출되지 못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간 포로는 10만-15만 명. 거기엔 많은 기능인들이 들어있었다. 조선에서 천민 취급을 받던 그들은 일본에서 예능인 반열에 오르면서 능력을 한껏 발휘해 각 분야에서 꽃을 피웠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이종환(李宗歡)'의 묘

경내의 묘원으로 들어갔다.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각자의 삶과 애환을 안고 잠들어 있는 영혼의 표식(標式)들이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필자는 '구야마 도우세이(九山道淸)'의 묘는 뒤로 미루고, '이종환(李宗歡)'의 묘를 찾기 시작했다. '오츠보(大坪)'씨와 '와타나베(渡邊)'씨도 동참했다. 셋이서 어린 시절 보물찾기 하듯이 뒤졌지만, 묘지가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관리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곱게 늙으신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었다. 따스한 가을볕이 할머니의 얼굴에 비쳤다.

"실례합니다. 혹시 '리소우칸(李宗歡)'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안내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미안 합니다. 제가 거동이 불편해서...묘원 중앙에 10여개의 묘지가 줄지어 있습니다, 거기에 '리소우칸(李宗歡)'의 묘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말을 좇아 30여 분을 헤매도 돌에 음각된 글씨가 너무 오래된 탓에 그의 묘비(墓碑)를 발견하지 못했다. 비바람을 겪은 세월이 400년이 넘었으니 아무리 돌(石)이라 해도 당연한 일이다. '오츠보 (大坪)'씨가 다시 관리실로 가서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할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 작은 보폭의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직접 묘비(墓碑)를 만지면서 말을 했다.

"이것이 '리소우칸(李宗歡)'의 묘이고, 그 옆이 그의 부인의 묘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족들의 묘가 이렇게 서 있습니다."

   
절(寺)의 묘지. 가운데 큰 묘가 이종환의 묘

'이리이 준코(八井潤子·84)' 할머니. '윤자(潤子)라는 이름에 걸맞게 얼굴에서 윤(潤)이 났다. 84세의 나이인데도 얼굴이 해맑았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 이렇게 찾아와 저에게 '리소우칸(李宗歡)'의 묘지에 대해 묻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가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본의 신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계속).

출저: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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