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녀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해 머물고 싶은/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허형만의 <그늘이라는 말>이라는 시(詩)가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폭염의 8월이다. 하지만 햇볕조차 구경할 수 없는 빗속의 8월이다. 시시각각 퍼붓는 빗줄기는 도시의 기능을 마비시키면서 사람들의 숨통을 조인다. 하늘에 대한 공포심만 커질 뿐 속수무책이다.

물가는 오르고 서민들의 삶은 더없이 팍팍하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은 산과 바다로 향한다. 휴식을 통한 재충전을 위해서일 것이다. 고속도로마다 차량으로 가득하고,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공항도 북적댄다.

며칠 전 지진과 태풍으로 몇 차례 연기했던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37-8도를 오르내리는 8월의 폭염을 일본에서 만났다. 지루한 장맛비 때문인지 차라리 무더위가 신선했다. 일본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고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결연한 의지가 곳곳에서 엿보였다. 저녁 회식자리에서 마시는 술도 후쿠시마 등 동북부 지방에서 생산된 술(酒)이 인기가 있었다. 술병에는 진재부흥기념(震災復興祈念)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쓰나미(津波)에서 회수한 술입니다>고 쓰여 있었다. 쓰레기 더미나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술이 다시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의 명성을 되찾자는 의기투합이 여름 태양만큼 강렬했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펼쳐본 마이니치신문의 '시대의 바람(風)'이라는 칼럼이 그러한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도우시샤(同志社)대학 '하마 노리코(浜矩子 · 59) 교수가 쓴 칼럼이었다. 하마(浜) 교수는 '파우스트 화(化)하는 일본'이라는 소제목 하에 "일본이 파우스트로 보여 진다"고 했다. 칼럼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파우스트 이야기의 핵심 테마는 항상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악마와의 계약'이다. 미진한 꿈의 달콤한 유혹으로 악마는 파우스트를 파멸로 몰아간다. 악마의 사명은 하나 밖에 없다. 인간으로부터 영혼을 빼앗아 지옥행 편도 열차에 태우는 것이다.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악마는 인간의 소망을 막무가내로 만족시켜 준다. 소망 실현의 진수성찬과 꼬임에 인간은 영혼을 악마에 매도해 버린다. 거만(巨萬)의 부. 넘치는 재능. 빛나는 커리어. 훌륭한 사랑. 그리고 영원한 젊음.........아무리 지식이 깊고, 영리함이 높으며, 견식이 넓어도 젊은 피가 쇠약해져 버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이 파우스트의 모습이 일본의 현상과 겹친다. 사라진 젊음의 꿈이여- 한 번 더. 한 때의 헝그리 정신을 되찾고 싶다. 불균형이 된 인구 피라미드를 어떻게든 착실한 피라미드형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다시 일등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무엇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 위세가 좋은 신흥세가 자꾸자꾸 일본을 앞질러 간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물건 만들기 파워도, 급격한 엔고 진행으로 풍전등화다. 이런 상태에서는 일본은 세계의 존경도 관심도 잃는다. 이대로는 일본이 지구의 위로부터 사라져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어떻게든 다시 넘버원이 되고 싶다."

절규에 가까운 하마(浜) 교수의 칼럼 '시대의 바람(風)'은 시대의 바람(望)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의 현상만이 아닌 우리의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우리의 미래도 날이 갈수록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도처에서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계절도 한술 더 떠서 악마가 되었다. 봄 · 여름 · 가을 · 겨울 구분 없이 들쑥날쑥 비바람을 몰아치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폭우 속에서 말복(末伏)을 맞게 되었다. 폭염이 그리운 8월이 빠르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