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경주 시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강의 요청에 선뜻 응했다. 경주를 방문한다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토록 멀게 느껴졌던 거리가 너무나 빨라져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서 불과 두 시간 만에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산자락아래 자리 잡은 역사(驛舍)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버스·택시 등 대중교통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를 보문단지로 잡았기에 택시 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지인들의 조언을 받아 한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때마침 문화해설사라는 한 여인이 동승하여 신라의 역사(歷史)와 경주의 유적지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대체로 아는 내용이 많았으나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용들을 잘 상기시켜주었다. 경주시의 신선한 발상에 기분이 좋았다. '이러한 작은 배려가 경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업무를 마치고 밤에는 보문호수의 둘레길을 걸었다. 빛바랜 반달이 검은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밀다가 사라졌다. 보문호수 언저리에 박목월(1916-1978) 선생의 시비(詩碑)가 있다고 해서 이곳저곳을 찾았으나 후득후득 빗방울이 떨어져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행복한 나그네의 발걸음이었다.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평소 필자가 자주 암송하는 선생의 시 <나그네>이다.
선생은 1916년 이 지역에서 태어났다.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길처럼〉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1946년 김동리·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했고, 조지훈·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했다. 1953년 처녀 시집 <산도화>를 간행하여 세인들의 이목을 끌었고, 1962년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76년 한양대 문리대 학장에 취임했다. 필자가 선생과 대화를 나누었던 시기는 그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시절인 1968년쯤이다. 제법 많은 대화중에서 “시인의 길은 고달픈 여정”이라는 말씀이 기억된다.
 

 장마전선 속에서도 다음날 아침은 밝게 열렸다. 보문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침 식사를 서둘러서 마치고 다시 선생의 시비를 찾아 나섰다. 몇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손사래를 쳤다. 더운 날씨에 무슨 시(詩) 타령이냐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도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나이 드신 한 아저씨가 열심히 쓰레기를 줍는 곳으로 다가섰다.
“혹시 박목월 선생의 시비....”
“아- 저 아래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선생의 시비가 있습니다.”
필자는 너무나 고마워서 고개를 여러 차례 숙였다. 쓰레기를 줍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언덕 너머 도로변까지 올라갔다가 내리막길에 서있는 시비 하나를 발견하고 뛰어갔으나 <안민가>이었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다. 백성을 사랑스런 아이로 여기시면 백성이 그 사람을 알겠지요....'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나라가 시끄러운 것일까?

  <안민가>를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서자 박목월 선생의 시비가 나타났다. 하얀 화강석 몸체의 검은 바탕에 <달>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뒤 늦은 발걸음이었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선생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시를 암송해 보았다.

 “桃花가지 반쯤가리고 달이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桃花가지 반쯤가리고 달이가네”

 경주시는 "벽이 없는 박물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곳곳에 문화재가 즐비하다. 시정 구호도 '새로운 천년 도전하는 경주'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의 수도(794-1185)로 고도(古都)이자 관광도시인 일본의 교토(京都)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작지만 강한 기업의 명소로 이미지를 구축하여, 닌텐도·니치콘·교세라·일본전산·무라타 제작소·호리바 제작소 등 첨단도시로 탈바꿈한 교토의 글로벌 마인드를 눈여겨보자는 것이다.